구스타프 클림트, 빈 분리파(Secession)
본문 바로가기
미술의 모든 것

구스타프 클림트, 빈 분리파(Secession)

by 시티시티 2024. 4. 14.

빈 분리파의 시작, 반 아카데미즘 운동

 19세기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미술, 건축, 공예 운동입니다. 과거의 예술 스타일을 벗어나서, 생활과 기능을 고려한 현대적인 조형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운동입니다. 분리파는 직선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며, 과거의 모든 예술 스타일과 확실하게 분리하여 새로운 시대의 혁신적인 공간 조형을 추구하였습니다. 

 1890년대의 유럽은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존 회화나 건축, 디자인에 보수파들은 전통문화를 지키려 노력한 시기였고, 진보파들은 기존의 미술가 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개혁을 요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역적이면서도 폐쇄적이고 국제 흐름에 둔감한 기존의 화단에 만족하지 않은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예술가협회를 탈퇴하고 1987년 뜻을 같이 하는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를 결성하면서 분리파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분리파는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게는 자유를'이라는 모토 아래 세 가지 주요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목표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정기적으로 작품의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둘째, 최고의 외국 예술가 작품을 빈에 들여오는 것입니다. 셋째 목표로는 독자적인 잡지를 발간하는 것입니다. 

클림트, 황금의 사나이

 클림트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한 오스트리아 예술가입니다.

어렸을 적 집이 가난하여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담벼락에 정치 현실을 비난하는 그림을 그려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재능을 인정받았고, 빈의 미술 공예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클림트는 수많은 여성 초상화를 그렸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초상화는 단 한 작품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사회와 고립된 생활을 하였지만 자유를 구속하는 세력에 맞서는 강인한 모습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미술가 협회의 오랜 전통에 도전하여 외국의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고, 분리파를 설립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클림트는 초기에는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벽화를 그렸지만, 나중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드로잉과 문양을 결합한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특히 작품에 금박 기법을 사용하여 화려하고 풍부한 장식을 더했으며, 고유한 빛과 광채를 부여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

<키스> : 클림트의 황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금빛의 화려한 가운을 입은 연인이 꽃밭에서 입맞춤을 하는 모습입니다. 금빛 옷을 입은 두 연인의 모습은 화려하고 로맨틱하지만, 여성의 발이 꽃밭의 끝에 걸쳐있어, 위태로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이는 젊음과 사랑의 덧없음을 상징하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주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값비싼 재료인 금박과 은박을 사용한 것은 부와 남자의 매력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에로티시즘을 한층 더 극대화시켰습니다. 클림트는 원시미술과 이국적인 미술의 다양한 양식에 매료되었고, <키스>는 유럽, 비잔틴, 일본 미술의 요소를 절충하여 장식을 극대화시키면서 효과적이고 상징성을 높인 작품입니다. 

<다나에> : 다나에는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아르고스의 공주입니다. 아르고스의 왕은 자신을 죽일 것으로 예언된 외손자를 막기 위해 딸인 다나에를 철탑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철탑에 가둔 다나에의 모습을 관능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 빈 추밀 고문관의 아내인 프리차 리틀러는 미술 애호가였습니다. 프리차의 남편이 의뢰한 초상화로서, 사각형의 화면 구성은 다른 초상화와 같지만 장식 모티브가 더욱 다양해지고 정교해졌습니다. 이 그림에서 손과 얼굴만이 사실적으로 그려졌습니다. 배경의 기하학적 패턴과는 서로 다른 구성 요소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클림트 초상화의 대표적인 표현방식입니다. 그녀의 머리 뒤로 보이는 반원형의 정교한 기하학적 장식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리 테레사 공주의 어린 시절>의 머리 스타일을 연상시킵니다. 이는 클림트가 가장 좋아했던 벨라스케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의식적으로 그려 넣은 것입니다. 

 

 클림트의 초기 예술은 여러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만년 9년간 작품들을 살펴보면 오스트리아 밖에서 전개되는 세계 미술의 변화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예술은 유럽적이지도 동시대를 대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유럽 미술가들과 달랐으며, 전통적인 예술의 범주에서 벗어나있었습니다. 추상회화가 전 유럽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미술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화가로서 세기말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의 문화에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클림트는 전통주의 미술 중심에 있던 문화에 대항하여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서 그는 전시기획자로서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대상을 이상화시키고 미화시키는 장식적인 클림트의 회화는 전통적인 역사주의와 현대의 상징주의 회화,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 서 있는 독보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로 간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비난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숨김없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관능적인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관능적인 작품들은 여성의 원초적 잠재의식을 표현한 것들이었습니다. 감각적이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의 작품은 관능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은 전통 미술에서 벗어나 클림트 예술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